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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17년9월27일 - 초대부통령 이시영 선생의 역사관 (4) 등록일 2017.09.27 22:21
글쓴이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조회 2392
-깊고도 넓은 역사의 세계-

-장도빈과 고대사

1920년대 독립운동가들이 지금 『환단고기』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란을 보면 혀를 끌끌 찰 것이 틀림없다. 『환단고기』가 위서인지 진서인지는 둘째로 치더라도 위서라고 공격하는 사람들의 수준이 너무 낮기 때문이다. 1948년 단국대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학장을 역임한 산운(汕耘) 장도빈(張道斌:1888~1963) 선생도 『환단고기』의 내용들을 대체로 알고 있었다. 1908년 20대 초반의 나이에 신채호 선생과 함께 『대한매일신보』의 필진으로 활약한 장도빈은 1928년에 『조선역사대전(朝鮮歷史大全)』을 쓴 역사학자다. 그가 『동광』 제7호(1926년 11월 1일)에 쓴 「단군사료」라는 논문에는 ‘작은 발견〔小發見〕과 나의 희열, 조선고대사 연구의 일단’이란 부제가 붙어 있다. 이 글에서 장도빈은 “개천(開天) 125년 무진 10월 3일에 국인(國人)이 단군을 추대해서 임검(壬儉:임금)으로 삼았고, 단군은 하백의 딸인 비서갑을 왕후로 취하고, 태자 부루를 낳았다”고 썼다. 또한 “팽우(彭虞)에게 산천을 다스리게 하고, 신지(神誌)에게 서계(書契)를 관장하게 하고, 고시(高矢)에게 농사를 관장하게 했다”고 썼고, “태자 부루(扶婁)를 보내 도산(塗山)에서 우왕과 회합했는데, 이것이 중국과 교제한 첫 시작”이라고 썼다. 『환단고기』의 「단군세기」나 「태백일사」의 내용 등과 대체로 일치하는 내용들이다. 장도빈은 또 “단군이 다른 아들 부여를 봉하셨다(封支子于扶餘)”라고 써서 부여를 단군의 아들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단군의 아들 부여

그런데 부여를 단군의 아들로 보는 것은 성재 이시영도 마찬가지다. 성재는 『감시만어』에서 단군은 아들이 넷 있었는데, 첫째가 태자 부루, 둘째가 부소(扶蘇), 셋째가 부우(扶虞), 넷째가 부여(扶餘)라고 보았다. 백범 김구 등이 1935년 항주(抗州)에서 결성한 한국국민당에서 발간하던 『한민』이란 잡지가 있다. 한국국민당은 임시정부 내의 여당이었는데, 『한민』 9호(1936. 11. 30)에 「건국기원절 후 느낌을 말함〔感言〕」이란 논설이 실렸다. 이글은, “망국노의 탈을 쓴 채 적의 말굽 밑에서 또다시 건국기원절을 맞은 우리는 뜨거운 눈물이 피 묻은 옷깃을 적실뿐이다”로 시작한다.

-비열한 사상을 퇴치하자

「건국기원절 후 느낌을 말함」은 나라가 망한 이유가 남의 것을 높이는 사대주의라면서 “건국기원절을 맞을 때 먼저 이 따위 비열한 사상을 퇴치하자”고 열변을 토했다. 그리고 “우리의 자손은 우리의 역사를 아라사(러시아)나 일본 문헌에서 찾게 되지 않게 만들어 주자”라고 다짐하면서 한국고대사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다. 그런데 이글에서도 단군에게는 ‘부루·부소·부우·부여’의 네 아들이 있었다면서 단군조선의 서쪽 강역을 란주(灤州)라고 말하고 있다. 난주는 근처에 난하가 있는 지금의 하북성 난현(灤縣) 부근이다. 북한의 리지린이나 남한의 윤내현 등이 처음으로 난하를 고조선과 진·한의 국경으로 본 것 같지만 그보다 몇십 년 전에 성재가 이미 난하를 단군조선의 서쪽 국경으로 보았던 것이다. 반면 성재 당시 조선총독부는 고조선을 평안남도 일대에 있었던 작은 소국이라고 주장했다.

-독립운동가들의 역사관

내가 역사를 공부하다가 놀라는 것은 내가 고민했던 이런 내용들이 알고 보면 이미 독립운동가들이 다 밝혀놓은 사실들이란 점을 거듭 확인할 때다. 우리나라는 독립운동가들의 이런 역사관을 가르치는 역사학과는 전무한 반면 조선총독부가 왜곡한 역사관을 ‘정설, 통설’로 가르치는 대학 역사학과들은 득실거린다. 이들의 공통적 특징은 관점이 맞고 그르고를 떠나서 무식하다는 점이다. 성재는 물론 백암 박은식, 석주 이상룡 같은 독립운동가들은 한국과 중국의 고전에 능통했다. 무원 김교헌은 당대 최고의 학자만이 역임할 수 있던 규장각 부제학 출신이니 더 말할 것이 없다. 한국과 중국의 수많은 경적(經籍)들을 대부분 외우거나 옥편 없이 술술 읽는 실력으로 한중 고대사의 진실을 이미 밝혔다. 그러나 해방 후에도 이분들의 역사관은 모두 사장되고, 조선총독부에서 왜곡한 무식한 역사관만 횡행하는 것이 21세기 우리의 현실이다.

-『감시만어』의 넓고 깊은 고대사관

성재가 『감시만어』에서 밝힌 단군의 아들 부여의 후손들에 대한 계보는 고대사를 보는 우리의 눈을 활짝 뜨게 한다.
“그 후 (단군의) 자손들이 분거(分居)하여 번성하였는데, 부여는 다시 갈라져서 동부여·북부여·졸본부여·서원(徐菀)부여·남부여가 되고 그 지파가 예·맥(濊貊), 옥저(沃沮), 숙신(肅愼)이 되었다. 서원부여는 그 후에 신라·고려·조선·한(韓:대한제국)으로 이어진다(『감시만어』)”
부여는 다섯 갈래로 나뉘어 번성하는데, 부여에서 동이족 역사의 여러 물줄기가 흘러나왔다는 것이다.
“졸본부여는 그 후 고구려, 발해, 여진(동서〔東西〕여진이 있다)이 되는데, 동여진의 후손이 금(金), 만청(滿淸:청나라)이고, 남부여의 후예가 백제이고, 기씨 조선의 후예들이 마한이며, 예(濊)의 후손은 서예(徐濊), 동예(東濊), 불내예(不耐濊)이고, 서예의 후손이 서국(徐國)이다(『감시만어』)”

- 단군 후예 및 부여족 제국들의 갈래

성재는 부여에서 갈라진 동이족 제국의 갈래를 이렇게 정리했다.
①서원부여→신라→고려→조선→대한제국
②남부여→백제
③졸본부여→고구려→발해→여진
④졸본부여 중 동여진→금→청
⑤기씨 조선→마한
⑥예(濊)의 후손 중의 서예(徐濊)→서국(徐國)

성재는 고구려·백제·신라·발해·고려·조선뿐만 아니라 만주족의 금나라, 청나라까지 우리 역사의 갈래로 바라보는 광대한 역사관을 갖고 있었다.

-서국과 서원왕

이중 예(濊)에서 갈라진 서국(徐國)에 대해서는 한중고대사에 아주 깊은 지식이 있지 않다면 이름조차 처음 들어본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성재는 초기 서국의 위치를 지금의 안휘성(安徽省) 사현(泗縣) 북쪽으로 보고 있는데, 주(周)나라 목왕(穆王:재위 서기전 1023~서기전 982) 때 주나라 군사를 크게 파하고는 중원의 서쪽은 주나라가 다스리고 동쪽은 서국이 다스렸다고 썼다. 서국에서 비교적 유명한 임금이 서언왕(徐偃王)인데 성재는 언왕 때 조공을 바치는 나라가 50여국에 달했다고 썼다. 서국은 초나라에 멸망하는데, 성재는 “옛부터 전하는 말에 의하면 서국은 절강성 소흥(紹興)을 중심으로 그 주위에 3천여리의 땅을 통치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서쪽의 주나라와 동쪽의 서나라

말하자면 한족(漢族)의 주(周)나라에 맞선 동이족의 서(徐)나라가 중원을 각각 동쪽(서국)과 서쪽(주나라)으로 나누어 통치했다는 이야기이다. 아직도 조선총독부 역사관을 따르는 식민사학자들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못 믿겠다”고 거품 물겠지만 서국이 중원 상당지역을 지배했다는 기록은 중국 사료에도 무수히 나온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 서문에서 “동이가 점차 강성해져서 드디어 회수(淮水)와 대산(垈山)으로 나뉘어 옮겨오더니 점차 중원〔中土〕까지 뻗어와 살게 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이런 한 예에 불과하다. 다만 『후한서』 「동이열전」 서문에는 서국의 영토가 사방 5백리에, 조공 바치는 나라가 36국이라고 성재의 기술보다 조금 작게 나온다.

-알에서 태어난 서언왕

서언왕에 대해서는 얼마 전 『매국사학의 18가지 거짓말(만권당, 2017)』을 출간한 황순종 선생이 첫 저서였던 『동북아대륙에서 펼쳐진 우리 고대사(지식산업사, 2012)』에서 자세하게 서술했다. 역사를 우리 관점으로 조금 깊게 공부하다 보면 서언왕에게 가서 닿는다는 사례다. 서언왕에 대해서는 『한비자(韓非子)』나 『회남자(淮南子)』에도 36국이 조공을 바쳤다고 나오고, 『사기』 「진(秦)본기」에도 나오는 역사적 사실이다. 『박물지(博物志)』에는 “서언왕의 궁인이 임신해 알을 낳았는데, 상서롭지 못하다고 생각해서 강가에 버렸더니 개가 물고 돌아와 따뜻하게 해서 태어난 아이가 서언왕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서언왕도 동이족 특유의 난생사화의 주인공이란 것이다.

-역사의 우민화

이시영 선생의 『감시만어』를 읽을 때 유감인 점은 이런 깊고도 넓은 내용들이 너무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다는 점이다. 아마도 우리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면 이 정도 내용은 다 알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 간략하게 서술했을 것이다. 서언왕이란 이름을 처음 들어본 사람들이 한국고대사 교수들이란 사실을 알면 너무 놀라서 할 말을 잃을 것이다. 
식민사학은 해방 후 72년이 넘도록 역사 우민화 정책, 즉 역사와 국민들을 분리시키는 정책을 펴왔다. “역사는 역사학자들에게 맡기라” 따위의 모토로 역사와 국민들을 분리시켜왔다. 그리고는 “한사군 한반도설”이니 “가야=임나설” 따위 무식한 이야기를 이른바 ‘정설, 통설’이라면서 전파해왔다. 
어떻게 보면 그들 자신이 너무 무식하기 때문에 우민화 정책을 펼친 것인지도 모르겠다. 성재 이시영의 『감시만어』는 무식한 학자들이 만든 이런 역사 우민화 정책은 일본 극우파들이나 중국 동북공정 소조에게 되돌리고 역사가 일종의 상식이었던 우리 선조들의 역사관으로 돌아가라고 말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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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1945년 11월 3일 , 중경에서 환국을 앞두고. 앞줄 오른쪽에서 4번째가 성재 이시영, 그 옆이 백범 김구〉